새벽묵상 :: 원주 기업도시 외곽에 위치한 시골교회 목사와 함께하는 아침을 여는 묵상입니다.
[화요 묵상] 내안에 그리스도 (창10:6-20)

오늘 창세기 10장 6-20절은 함의 네 아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얼핏 보면 다소 흥미가 떨어지고,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족보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족보는 단순한 이름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앞으로 성경 전체를 흘러가게 할 영적 방향과 문명의 흐름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앞서 창세기 9장 내용을 살펴보면,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사건이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아들들의 대응 장면이 비추어집니다. 우선 그 장면을 본 함은 밖으로 나가 아버지의 수치를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연약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덮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감싸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가져갔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수치를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구경하지 않았습니다.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덮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차이를 봅니다.
성경적 <정의>는 죄를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 나단도 다윗의 범죄를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적 정의는 사람의 수치를 즐기는 형태로 드러나도 안 됩니다.
정의는 하나님의 뜻을 굽지 않게 세우는 것이고,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리는 것입니다. 정의 없는 사랑은 방임이 되고, 사랑 없는 정의는 폭력이 됩니다. 아버지의 수치에 대한 함의 폭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함의 태도와 노아가 가나안에게 선언한 저주는 이후 성경 속에서 어떤 흐름으로 나타납니까?
함의 4명의 아들(자손) 중 핵심 인물은 니므롯, 미스라임, 가나안입니다. 이 셋은 단순한 “개인 이름”이 아니라 이후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권력, 세상 문명, 약속의 땅에서의 갈등을 대표합니다.
1. 니므롯은 바벨을 건축합니다.
영적인 통찰은 수치를 덮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자기 수치를 감추기 위해 <바벨>을 세웁니다. 함의 첫째 아들 구스가 니므롯을 낳고 용사의 기질을 타고 난 니므롯은 강한 힘으로 시날 땅에 바벨을 세웁니다.
수치를 덮지 않고 밖으로 폭로한 함, 이로 인해 노아의 저주를 받은 함의 가문은 세상에서 용사요,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로 <바벨>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집중시키고 크고 높은 웅장함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이것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연결하는 통찰을 본다면 우리의 태도와 방향은 어떠해야 할까요?
2. 그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은 애굽입니다.
애굽은 처음에는 살려주는 땅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기근으로 살기 힘들 때 애굽에 발을 들였고, 요셉도 형제들에게 배신당하여 팔린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함의 자손 미스라임(애굽)은 그 땅에 들어온 상처입은 사람들, 오갈 때 없는 사람을 이용하여 종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애굽과 애굽의 문명을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애굽은 풍요롭습니다. 그 풍요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살 곳을 제공하지만 그의 대가는 결국 사람을 종으로 만듭니다.
하나님 없는 풍요는 결국 사람을 종으로 만듭니다.
3. 마지막으로 함의 넷째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가나안 문명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들어가 정복하고 싸워야 할 대적의 땅으로 가나안은 그 존재가 쓰임 받습니다. 끔찍하지 않습니까?
복음은 수치를 감추기 위해 탑(바벨)을 쌓지 않습니다.
복음은 수치를 감추기 위해 돈(애굽의 풍요)을 신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복음은 수치를 감추기 위해 쾌락(가나안)으로 도망가지 않습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수치를 담당하셨습니다.
내 안에 바벨이 아닌,
내 안에 미스라임이 아닌,
내 안에 가나안이 아닌,
내 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정의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리는 사랑을 담아내는 화요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원주 기업도시, 작은 교회 목사의 묵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