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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 새벽 묵상] 큰 불을 끄고 난 뒤 (창세기 3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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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오랜 세월 두려워했던 에서를 마침내 만났습니다.

야곱은 에서에게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밤 약복강에서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고 그를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향하여 달려와 목을 어긋맞추어 안고 입맞추며 함께 울었습니다.

야곱은 그 순간을 바라보며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에서와 화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서가 제안합니다.

 

우리가 함께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그런데 야곱은 함께 가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녀들이 아직 어리고 양과 소에게 새끼가 있기에 무리하게 이동하면 가축이 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에서에게 먼저 가라고 합니다. 자기는 천천히 뒤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화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는 화해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에서는 세일로 갔고, 야곱은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화해가 곧 동행은 아니라는 것까지!!!

 

그러나 이 다음이 중요합니다.

 

야곱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서원하고 약속한 그 하나님의 집, 벧엘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집을 계속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집, 벧엘로 가지 않고 숙곳으로 갑니다.

 

17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로 야곱의 방향이 어긋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한 우릿간을 짓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저자는 <자기를 위하여>, <그의 가축을 위하여>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독립된 의지적 표현으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듯한 뉘앙스를 붙입니다.

 

큰 불 끄고 나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겁니다.

 

은근히 뭔 일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내가 봐도 불안한데, 왜 야곱은 보이지 않았을까요?

누가 봐주면 쉬운데, 자기 스스로 하면 불안합니다.

 

큰 문제가 해결된 후,

은혜를 받은 후,

첫 걸음과

방향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은 그것을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을 붙입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원주 기업도시, 작은 교회 목사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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