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묵상 :: 원주 기업도시 외곽에 위치한 시골교회 목사와 함께하는 아침을 여는 묵상입니다.
[금요 묵상] 사람은 떠나도 말씀은 남습니다. (창 23:1-20)

다른 사람과 견주어 보는 것은 자칫 비교될 수 있습니다.
비교하지 말라는 말을 왜 하는지 아십니까?
너보다 낫다 못낫다 정도가 아니라 비교의 대상이 정확하지 않아서입니다.
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감춥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더 있는 것처럼 위선합니다.
그러한 거짓된 잣대에 당신의 인생의 수고를 비교하다 낭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대상과는 견주어 보면 오히려 위로가 될 때가 더 많습니다.
성경은 감추거나 위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평가로 위로를 받든지 아니면 정상적으로 더 분발할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아브라함 보세요.
여러분은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믿음의 조상, 거부(큰 부자) 이 정도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대부분 나쁜 이미지는 아니고 아브라함처럼 되고 싶거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겹니다.
그런데 그의 실제적인 인생을 보세요.
하나님따라 나섰다가 25년이 되어서야 아들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뻔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먼저 보내게 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입니다(사라와 10살 차이).
137세가 되도록 아들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 더 있었지만(이스마엘) 가정의 갈등으로 헤어졌습니다.
평생을 서로 의지하던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게 된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슬펐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의 사정이 참 딱합니다.
아내 사라를 매장할 1평의 땅조차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나 부모를 떠나 친구 한 명조차 없는 땅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반백년을 지났지만 내 재산, 내 땅 하나 없는 목회자의 현실이 때로는 슬슬하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심정이 조금 더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의 땅을 준다고 했는데, 헤브론에서 아내 사라가 죽고, 장례를 치를 땅이 없는 아브라함의 처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은근히 빗대거나 돌려 원망하는 듯한 츠임새조차 아브라함의 말에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내게 땅을 주시겠다고 하면서 여태껏 내가 여기 온 지가 몇 년째인데 땅 1평 없습니까? 내 아내 사라를 묻을 땅도 저 이방인에게 구걸해야 합니까?
제가 이방인입니까? 저 사람들이 이방인입니까? 이런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존대하여 말합니다.
4절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그러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족속에게 몸을 굽히며 존중하며 의탁합니다.
아브라함의 태도를 본 지역사람들은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존대하며, “내 주여”라고 답하며 땅을 내어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저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막벨라 밭과 굴을 자기 소유로 확정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 전체를 약속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137세가 되도록 자기 명의로 가진 가나안 땅은 사실상 아내를 묻을 무덤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막벨라 밭을 은 400세겔을 주고 에브론에게 사고, 아내 사라를 장사합니다.
약속은 가나안 전체인데,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지금 현실은 무덤 한 평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차이와 gap으로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롯도 가고
이스마엘도 떠났습니다.
이삭도 드렸고(이미)
사라도 가고
아브라함도 점점 늙어가고 있습니다.
젊음도 가고, 사람도 가지만
떠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큰 것을 약속하셨는데, 지금 내 손에는 겨우 막벨라굴 하나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말씀하셨는데, 현실은 아직 슬픔밖에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약속이 더딘 것이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 원주 기업도시, 작은 교회 목사의 묵상
